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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EC-121 격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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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9년 EC-121 격추 사건은 1969년 4월 15일, 미국 해군 소속 EC-121 워닝스타 정찰기가 북한에 의해 격추된 사건이다. 이 항공기는 일본 아쓰기 해군 비행장에서 이륙하여 동해 상에서 소련과 북한의 전파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으며, 북한 영공 침범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사건 발생 후, 미국은 대규모 수색 및 구조 작전을 펼쳤으며, 북한에 대한 군사적 보복을 고려했으나, 결국 공중 정찰 비행 재개로 대응했다. 이 사건은 미국과 북한 간의 적대감을 심화시키고 냉전 시기 미·소 간의 긴장을 고조시켰으며, 한반도 안보 상황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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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EC-121 격추 사건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사건에 연루된 미국 해군 EC-121 BuNo 135749 항공기
사건에 연루된 미국 해군 EC-121 BuNo 135749 항공기
분쟁한반도 분쟁, 냉전의 일부
날짜1969년 4월 15일
장소동해, 청진에서 167 떨어진 해상
결과북한의 승리
지휘관 1알 수 없음
지휘관 2알 수 없음
병력 1MiG-21 2대
병력 2EC-121 워닝 스타 1대
피해 1없음
피해 2EC-121 워닝 스타 1대 파괴, 31명 사망
사건 명칭
영어EC-121 shootdown incident
한국어미국 해군 EC-121기 격추 사건

2. 사건의 배경

냉전 시기, 미국은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Beggar Shadow(구걸 그림자)"라는 암호명으로 정찰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1969년 4월 15일, 미국 해군 소속 EC-121M 워닝스타 정찰기 1대가 주일 미군아쓰기 해군 비행장에서 이륙하여 동해 상공에서 소련북한 간의 전파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임무는 NSA가 주도했다.

2. 1. EC-121 워닝스타의 임무

1969년 4월 15일 화요일 오전 7시 미국 해군 소속 아쓰기 해군 비행장에서 조기 경보기 EC-121 워닝스타 1대가 이륙하였다. 이 비행기의 콜 사인은 "Deep Sea 129"였다. 기내에는 8명의 장교와 23명의 엔지니어가 탑승하고 있었고, 그 중 한 명은 미국 해병대원이었다. 이들 중 9명은 러시아어한국어의 암호통신을 해독하는 언어학자들이었다.[4][5][3]

Deep Sea 129에 주어진 임무는 동해를 향해 "무스 포인트(Musu Point)"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길주군 근해에서 소련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의 전파 정보 수집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이 임무는 EC-121기가 타원형 궤도 코스를 따라 비행하고 전파를 감청한다는 것에서 북동쪽으로는 소련을 타겟으로 하고 있었다. 또 이 임무는 명목상으로 미국 태평양군 제7함대의 지휘 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NSA가 시행한 첩보 활동이었다.[6][7]

Deep Sea 129의 임무는 일상적인 ''Beggar Shadow'' 신호 정보(SIGINT) 수집 임무였다. 비행 경로는 NAS 아쓰기에서 이륙하여 동해를 가로질러 북서쪽으로 비행하여 길주(Musu Point) 앞바다에 도착한 다음 EC-121M이 소련 방향으로 북동쪽으로 돌아서 타원형 궤도를 따라 궤도를 도는 것이었다. 이는 경주 트랙과 유사하며, 임무가 완료되면 오산 공군 기지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오버스트리트 중령의 명령에는 북한 해안에서 50nmi 이내로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VQ-1은 2년 동안 해당 경로와 궤도를 비행했으며, 임무는 "최소한의 위험"으로 평가되었다. 1969년 첫 3개월 동안 해군과 미 공군 정찰기가 북한 동해안에서 비슷한 임무를 거의 200번 수행했지만 아무런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3]

이러한 임무는 표면적으로는 제7함대태평양 사령부(CINCPAC)의 지휘를 받았지만, 작전적으로는 국가안보국의 지시를 받아 일본 가미세야 해군 지원 시설(NSF Kamiseya)에 있는 해군 보안 그룹 분견대에 의해 통제되었다.[3]

3. 격추 과정

1969년 4월 15일, 조선인민군 공군 MiG-21 전투기 2대가 원산 근처 동통총리에서 이륙하여 미국 해군 EC-121M 정찰기 "딥 시 129"를 추적했다. 13시 47분, 미그기의 레이더 추적이 딥 시 129의 레이더 추적과 합쳐졌고, 2분 후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북한 언론이 "단 한 발"로 격추했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AA-2 아톨 공대공 미사일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7]

3. 1. 미군의 감지 및 대응

이 임무는 2년간 계속되었으며, 북한 해안에서 50해리 안으로 접근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고, 그동안 북한의 반격은 없었다. 그러나 주한 미군 군산 기지의 레이더와 United States Army Security Agency|미국 육군 보안청|미국 육군 보안청영어(ASA)는 조선인민군 공군의 MiG-21 전투기 2대가 "딥 시 129"의 행동을 탐지하고 이륙한 것을 감지했다.[3]

"딥 시 129"는 13시에 예정대로 작전 보고를 전송했지만, 이상은 없었다. 그러나 MiG-21이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작전 중지를 전달했다. MiG-21을 탐지한 약 2분 후인 13시 47분, "딥 시 129"는 레이더에서 사라졌다.[3]

3. 2. 격추 및 결과

이 사건으로 EC-121은 북한 청진시에서 90해리(167km) 떨어진 동해 상공(북위 41도 28분, 동경 131도 35분)에 추락했다.[3] 승무원 31명 전원이 사망했으며,[3] 이 중에는 해병대 NCO을 포함, 해군 보안 그룹 암호 기술자(CT)이자 러시아어한국어 통역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3]

4. 사건 이후

미국은 EC-121 격추에 대응하여 제71기동부대(TF-71)를 동해에 배치했다.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타이콘데로가, 레인저, 호넷과 순양함, 구축함, 전함 뉴저지 등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 한국 전쟁 이후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무력 시위 중 하나였다.[10]

사건 이후, L. 멘델 리버스 하원의원을 포함한 일부는 북한에 대한 보복을 요구했다.[8] 1969년 4월 16일,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무력 시위, EC-121 임무 재개, 군사적 행동 등 다양한 대응 방안을 고려했다.[7] 합동참모본부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폭탄의 2.5배에 달하는 핵무기 공격 계획을 제시하기도 했다.[11]

합동참모본부는 선덕과 원산의 비행장을 폭격하는 계획을 준비했고, 태평양 사령관은 일본해에 함정을 배치하여 북한 항공기를 격추하고 선박을 나포하며 해안 포격을 가할 것을 제안했다.[7]

그러나 며칠 동안 북한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닉슨 행정부는 정보 부족과 소통의 어려움을 겪었고,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EC-121 위기에서 우리의 행동은 약하고, 우유부단하며, 무질서했다"고 평가했다.[7] 닉슨은 "그들(북한)은 다시는 이럴 수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며 정찰 비행 재개를 명령했다.[7]

4. 1. 미국의 대응 및 수색



미국 육군기밀 보전청(ASA)은 Deep Sea 129가 사라졌다는 것을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 등에게 보고했다. 수색 및 구조 활동을 위해 미국 공군과 해군의 항공기 최대 26기가 투입되었고, 구축함 등이 사세보 해군 기지에서 출항했다.[3]

다음 날 오전 9시 30분, 기체 잔해가 발견되었다. 이 해역에는 소련의 함정과 항공기도 출동하였다. 4월 17일 정오, 헨리 W. 터커함에서 2구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나머지 29명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17]

당시 닉슨 행정부는 전술 핵무기를 사용한 보복 공격을 검토했던 것으로 기밀 해제된 문서를 통해 알려졌다.[17] 처음에는 어느 기관도 경계하지 않았다. EC-121이 레이더 범위를 벗어나 빠르게 하강하도록 절차가 정해져 있었고, 오버스트리트가 공격을 받고 있다고 전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공해 상에서의 향후 비행을 보호하기 위해 제71기동부대(TF-71)를 활성화하여 대응했다. 초기 기동부대는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타이콘데로가, 레인저, 호넷와 순양함 및 구축함으로 구성되었으며, 여기에는 전함 뉴저지도 포함되었다. TF-71 소속 함정들은 대부분 동남아시아 임무에서 차출되었다. 이러한 배치는 한국 전쟁 이후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무력 시위 중 하나가 되었다.[10]

공격 이후, L. 멘델 리버스 하원의원을 포함한 일부는 북한에 대한 보복을 요구했다.[8] 4월 16일,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다음과 같은 선택 사항을 고려했다.[7]

  • 해군 및 공군을 이용한 무력 시위
  • 호위를 동반한 EC-121 임무 재개
  • 다음과 같은 "선별된 군사적 전투 행동":
  • 공해 상에서 북한 항공기 격추
  • 군사 목표에 대한 선별적 공습
  • 군사 목표에 대한 해안 포격
  • 비무장 지대를 넘어선 지상 습격
  • 포병 또는 미사일 사격으로 비무장 지대 인근 군사 목표 공격
  • 미국 잠수함에 의한 북한 해군 선박 공격
  • 봉쇄
  • 북한 해역 기뢰 부설/기뢰 부설 위협
  • 해외 북한 자산 압류
  • 전략 핵무기 사용


합동참모본부 의장인 얼 윌러 장군은 NSC에 히로시마에 투하된 폭탄의 2.5배에 해당하는 각 30킬로톤의 핵탄두를 탑재한 미사일로 북한을 공격하는 계획을 제시했다. 윌러는 그러한 공격이 보복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하루 뒤,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닉슨에게 전화로 전략 핵탄두 사용으로 인한 보복 가능성을 고려하여 "우리는 전술 핵무기를 사용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11]

NSC의 아이디어 외에도 합동참모본부는 선덕과 원산의 비행장을 폭격하는 여러 계획을 준비했다. 태평양 사령관(CINCPAC)은 일본해에 항공기를 격추할 수 있는 미사일을 장착한 함정을 배치하여 북한 항공기를 격추하고, 국제 수역으로 진입하는 다른 북한 선박(어선 등)을 나포하며, 해안(특히 원산 인근)에 포격을 가할 것을 제안했다.[7]

결국, 공격 이후 며칠 동안 북한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새로운 닉슨 행정부는 미국과 북한 군대의 위치와 가용성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으며, 행정부가 태평양 지역의 관계자들과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 정보가 계획자들에게 전달되었을 때는 대응하기에 너무 늦었다.[7] 닉슨과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사건의 결과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으며, 키신저는 "EC-121 위기에서 우리의 행동은 약하고, 우유부단하며, 무질서했다"고 묘사했다.[7] 북한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을 것이 분명해지자 닉슨은 "그들(북한)은 다시는 이럴 수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고 "공중 정찰 비행 재개"를 명령했다.[7]

항공모함 전단호위 전력
사령부항공모함항공모함 비행단전함 / 순양함DLG / DDG구축함구축함 / 호위 구축함
제7 항공전대엔터프라이즈제9 항공단뉴저지스테레트메러디스거크
제3 항공전대레인저제2 항공단시카고데일헨리 W. 터커라이먼 K. 스웬슨
제9 항공전대타이콘데로가제16 항공단오클라호마시티머핸페리존 W. 윅스
대잠전투 제5 전단호넷제57 대잠 항공단세인트폴파슨스어니스트 G. 스몰래드퍼드
————————린드 맥코믹셸턴데이비슨
——————————리처드 B. 앤더슨——


4. 2. 북한의 반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건 직후 최고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사건 발생 2시간 후 북한 매체는 EC-121기를 "뻔뻔한 미국 제국주의 침략군의 비행기"[8]라고 칭하며, "영공 깊숙이 침투하여 정찰 활동을 벌였다"고 비난했다.[8] 이 사건을 "보복의 불길을 퍼부어 단 한 발의 사격으로 격추한 빛나는 전투적 성공"으로 묘사했다.[8]

1971년 4월, 북한은 "반제·반미 투쟁"이라는 제목의 선전우표를 발행했는데, 여기에는 억류된 푸에블로호 승무원과 함께 "EC121"이라고 적힌 비행기 잔해가 그려져 있었다.[14]

2006년 6월, 북한 당국은 미국의 스파이 활동을 비난하며 "미국은 1960년대 EC-121의 비참한 운명을 잊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해 이 사건을 언급하는 듯한 메시지를 보냈다.[15]

4. 3. 소련의 반응

냉전이 최고조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신속하게 수색을 지원했다. 소련 구축함 2척이 동해로 파견되었으며, 이들의 참여는 EC-121 공격에 대한 모스크바의 불만을 강조했다.[8]

5. 논란 및 의혹

EC-121 격추 사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공통적으로 북한을 불량 국가로 간주하고 있다. 리처드 닉슨 행정부는 북한이 국제법을 준수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푸에블로호 사건과 마찬가지로 북한은 EC-121기가 자국 영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음에도 공격을 감행했다.[7]

일각에서는 김일성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공격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부족하다.[8] 또, 우발적인 격추 가능성도 제기되었으나,[8] 북한의 신속한 언론 보도와 EC-121기가 북한 영공 깊숙이 침입했다는 주장을 들어 많은 이들이 이 가능성에 동의하지 않는다.[7] 결국, 북한 외부에서는 정확한 격추 동기를 파악할 충분한 정보가 없다.

5. 1. 격추의 정당성

북한은 EC-121이 자국 영공을 침범했다고 주장했지만, 미국은 이를 부인했다. 미국은 EC-121이 국제 공역에서 비행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7]

리처드 닉슨 행정부는 북한이 국제법의 기준을 따를 것이라고 추정했다. 푸에블로호 사건과 마찬가지로 평양은 EC-121기가 북한 영토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감행했다.[7]

다른 출처에서는 이 공격이 김일성의 생일이 4월 15일에 해당하여 그를 기념하기 위해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충분하지 않다.[8]

일부에서는 이것이 우발적인 격추일 수 있다고 믿기도 하지만,[8] 북한의 신속한 언론 보도와 해당기가 북한 영공 깊숙이 침입했다는 주장을 근거로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7] 결국, 북한 외부에선 진정한 동기를 파악할 충분한 정보가 없다.

5. 2. 미국의 대응에 대한 비판

닉슨 행정부의 소극적인 대응은 미국 내에서 비판을 받았다. L. 멘델 리버스 하원의원을 포함한 일부는 북한에 대한 보복을 요구했다.[8] 공격 이후,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는 해군 및 공군을 이용한 무력 시위, 호위를 동반한 EC-121 임무 재개, 선별적 군사 행동 등의 대응 방안을 고려했다.[7]

하지만 결국 며칠 동안 북한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새로운 닉슨 행정부는 미국과 북한 군대의 위치와 가용성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고, 태평양 지역 관계자들과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7] 닉슨과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사건의 결과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으며, 키신저는 "EC-121 위기에서 우리의 행동은 약하고, 우유부단하며, 무질서했다"고 묘사했다.[7]

일각에서는 보다 강력한 군사적 대응을 요구하기도 했다. 합동참모본부 의장인 얼 윌러 장군은 NSC에 히로시마에 투하된 폭탄의 2.5배에 해당하는 핵탄두를 탑재한 미사일로 북한을 공격하는 계획을 제시하기도 했다.[11]

6. 사건의 영향 및 평가

1969년 EC-121 격추 사건은 냉전 시대의 긴장 관계와 북한의 도발적인 군사 행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당시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전술핵무기를 사용한 보복 공격을 검토했던 것으로 기밀 해제된 문서를 통해 알려졌다.[17]

6. 1. 한반도 안보에 미친 영향

이 사건은 한국 전쟁 이후에도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대북 감시 및 정보 수집 활동을 강화했다.

사건 직후, L. 멘델 리버스 하원의원을 포함한 일부 인사들은 북한에 대한 보복을 요구했다.[8]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해군 및 공군을 이용한 무력 시위, EC-121 임무 재개, 선별적 군사 행동 등 다양한 대응 방안을 고려했다.[7]

합동참모본부 의장인 얼 윌러 장군은 NSC에 히로시마에 투하된 폭탄의 2.5배에 해당하는 핵탄두를 탑재한 미사일로 북한을 공격하는 계획을 제시하기도 했다.[11]

그러나 닉슨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적 대응 대신, 제71기동부대(TF-71)를 활성화하여 대응했다. 엔터프라이즈, 티콘데로가, 레인저, 호넷 등 항공모함과 순양함, 구축함, 전함 뉴저지 등으로 구성된 TF-71은 한국 전쟁 이후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무력 시위 중 하나였다.[10]

결국 닉슨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보복 대신 정찰 활동 재개를 선택했다. 닉슨은 "그들(북한)은 다시는 이럴 수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며 정찰 비행 재개를 명령했다.[7]

이 사건은 미국이 북한에 대한 감시 및 정보 수집 활동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북한은 1971년 4월에 푸에블로호 승무원과 "EC121"이라고 적힌 비행기 잔해를 묘사한 선전우표를 발행하여 반제·반미 투쟁을 강조했다.[14]

2006년 6월, 북한 당국은 미국에 의한 스파이 활동을 비난하며 "미국은 1960년대 EC-121의 비참한 운명을 잊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15] 현재도 RC-135를 이용한 미국군의 대북 첩보 활동이 지속되고 있다.

6. 2. 국제 관계에 미친 영향

이 사건으로 미국과 북한 간의 적대 관계는 더욱 깊어졌다. L. 멘델 리버스 하원의원을 포함한 일부는 북한에 대한 보복을 요구했다.[8]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다양한 대응 방안을 고려했는데, 여기에는 해군 및 공군을 이용한 무력 시위, 호위를 동반한 EC-121 임무 재개, 군사 목표에 대한 선별적 공습 및 해안 포격, 비무장 지대를 넘어선 지상 습격, 미국 잠수함에 의한 북한 해군 선박 공격, 봉쇄, 북한 해역 기뢰 부설, 해외 북한 자산 압류, 전략 핵무기 사용 등이 포함되었다.[7]

합동참모본부 의장 얼 윌러 장군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폭탄의 2.5배에 달하는 핵탄두를 탑재한 미사일로 북한을 공격하는 계획을 제시했고, 헨리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은 전술 핵무기 사용을 언급하기도 했다.[11] 합동참모본부는 선덕과 원산 폭격 계획을 준비했고, 태평양 사령관은 북한 항공기 격추 및 선박 나포, 해안 포격을 제안했다.[7]

그러나 닉슨 행정부는 정보 부족과 소통의 어려움으로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고, 키신저는 "EC-121 위기에서 우리의 행동은 약하고, 우유부단하며, 무질서했다"고 평가했다.[7] 결국 며칠 동안 미·소 양 해군에 의한 군사적 시위가 벌어졌고, 닉슨은 만취 상태에서 전술 핵무기를 사용한 보복 공격을 명령했지만 키신저의 만류로 철회되었다.[12][13]

미국은 제71기동부대(TF-71)를 활성화하여 대응했는데, 이는 한국 전쟁 이후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무력 시위 중 하나였다.[10] 이 기동부대는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티콘데로가, 레인저, 호넷와 순양함, 구축함, 전함 뉴저지 등으로 구성되었다.[10]

결국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지만, 미국은 정보 수집 비행을 재개하여 북한의 군사력으로 미국의 정보 수집 활동이 방해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사건은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 긴장을 고조시키는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6. 3. 현재까지의 영향

미국 닉슨 행정부는 기밀 해제된 문서를 통해 전술핵을 사용한 보복 공격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17]

북한 우정 당국은 1971년 4월 반제·반미 투쟁을 주제로 한 선전우표를 발행했는데, 여기에는 억류된 푸에블로호 승무원과 "EC121"이라고 적힌 비행기 잔해가 그려져 있었다.[14]

미국군의 대북 첩보 활동은 현재도 RC-135를 사용하여 계속되고 있다. 2006년 6월, 북한 당국은 미국의 스파이 활동을 비난하며 "미국은 1960년대 EC-121의 비참한 운명을 잊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이는 이 사건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15]

참조

[1] 문서 DPRK supreme leader Kim Il Sung's 57th birthday
[2] 서적 Cold war shoot downs: Part two Challenge Publications Inc.
[3] 서적 The World Wide Military Command and Control System: Evolution and Effectiveness Air University Press 2012-02-14
[4] 웹사이트 Korea shootdown of Navy EC-121 in 1969 http://www.willyvict[...] Willy Victor 2007-05-21
[5] 문서 Airlines & Airliners No. 9 – Super Constellation Airline Publications & Sales Ltd. 1973-11
[6] 서적 Bytes and Bullets: The Information Technology Revolution and National Security on the Korean peninsula APCSS 2007-05-23
[7] 간행물 EC-121 down! United States Naval Institute
[8] 간행물 N. Korean shootdown of EC-121 killed 30 sailors, one marine Gannett Co., Inc
[9] 웹사이트 F-106 Delta Dart at Osan Air Base Korea http://www.f-106delt[...]
[10] 서적 Scenes from an Unfinished War: Low intensity conflict in Korea 1966–1969 Diane Publishing Co
[11] 서적 One Man Against the World: The Tragedy of Richard Nixon Henry Holt and Company
[12] 뉴스 Papers reveal Nixon plan for North Korea nuclear strike https://www.theguard[...] 2017-11-24
[13] 뉴스 That time a drunk Richard Nixon tried to nuke North Korea https://www.business[...] 2017-11-24
[14] 서적 北朝鮮事典―切手で読み解く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 竹内書店新社
[15] 뉴스 N Korea in 'US spy plane' warning http://news.bbc.co.u[...] 2006-10-17
[16] 뉴스 동아일보, 1969년 4월 17일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69-04-17
[17] 뉴스 美 69년 北에 `전술핵 사용' 비상계획 검토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1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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